"이게 건설사판 쏘나타와 그랜저"…아파트, 화려해지는 이유 [집코노미]

입력 2024-02-23 18:00  


▶전형진 기자
제가 어린 시절 그랜저는 입신양명, 출세의 상징 같은 차였습니다. 하지만 이젠 대중적인 차가 돼버렸죠. 과거의 쏘나타와 같은 위치가 된 것입니다. 지금의 제네시스 G80이 과거의 그랜저와 같은 위상인 것이고요.


일종의 인플레이션입니다. 그랜저가 너무 많이 팔리면서 대중화되자 벌어진 일이죠. 그런데 떨어진 그랜저의 가치를 올리는 일보다 쉬운 게 있습니다. 그 빈 자리에 새로운 걸 만들어 넣는 것이죠. 그게 바로 제네시스 G80이고요.

갑자기 웬 자동차 애기냐 싶겠지만 어딘지 낯익습니다. 우리가 요즘 부동산시장에서 보고 있는 일이죠. 과거엔 e편한세상, 푸르지오, 힐스테이트 아파트가 참 많았지만 요즘 재개발·재건축 수주전을 보면 어떤가요. 서울 웬만한 지역의 경우 건설사들이 이 같은 브랜드로 제안하지 않습니다. 아크로, 써밋, 디에이치라는 브랜드를 내세우고 있죠.


이 표가 건설판 쏘나타와 그랜저입니다. 그동안 건설사들의 아이덴티티는 가운데 있는 주택 브랜드였습니다. 그러다 오른쪽의 고급 브랜드를 만들기 시작했죠. 하이엔드 브랜드라고도 하는데요. 이걸 왜 만들었을까요. 강남 등지에서 재건축 아파트를 수주하려다 보니 다른 지역들과의 차별화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온국민이 쏘나타를 탈 때 그랜저가 필요했던 분들처럼 말이죠.

그런데 건설사들이 강남에서만 영업을 하는 건 아니죠. 전국에서 수주를 해야 합니다. 문제는 원청인 조합들의 눈이 이미 높아졌다는 것입니다. 강남이 아닌 지역들에서도 고급 브랜드를 요구하기 시작한 것이죠. 그래서 이제 건설사들은 수도권 도시나 지방 광역시에서 수주할 때도 하이엔드 브랜드를 적용해주겠다고 제안하게 됩니다. 그래야 사업을 따고, 따야 돈을 버니까요.


그러다 어느 조용한 마을에서 건설사 한 곳이 하이엔드 브랜드 깃발을 하나 꽂습니다. 주변은 전부 일반 브랜드인데 말이죠. 옆집들이 가만히 있을까요? "우리도 해달라"는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합니다. 결국 나중에 이 마을에서 재건축 시공사가 되려면 적어도 하이엔드 급으로 제안해야 되는 암묵적인 수준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하이엔드 인플레이션이 일어날 때 타이밍이 조금 안 맞은 조합은 어떻게 나올까요. 이미 일반 브랜드로 짓기로 했단 말이죠. 이럴 땐 착공을 코앞에 두고 설계를 다 뜯어 고치긴 힘드니 마감적인 부분만 하이엔드급으로 올립니다. 단지명에 하이엔드 브랜드가 들어갔지만 실제 설계에선 특화 부분이 거의 반영되지 못한 것이죠. 서울 도처에도 이 같은 단지들이 종종 있습니다.


이렇게 온세상이 하이엔드 브랜드로 물들었습니다. 이 상황에서 강남 수주전이 다시 열린다고 해보자고요. 건설사들이 강남 재건축조합에 하이엔드 브랜드를 제안하면 조합원들이 "좋네" 하고 뽑아줄까요. 맨처음에 말씀드렸던 것처럼 모두가 그랜저를 타면 비로소 제네시스가 필요해지는 것이죠.


현재 재개발·재건축 시장은 이 지점까지 와 있습니다. 기존의 하이엔드 브랜드와 이름은 똑같지만 실제적인 사양은 조금 더 좋아졌어요. 고급이 아니라 초고급이 된 것입니다. 향후 압구정과 성수전략정비구역 수주전을 감안하면 초초고급이 필요해지겠지만요. 모두가 제네시스를 타면 그땐 또 상위 브랜드를 만들어야 할까요?

자동차가 사람의 신분을 말해주는 게 아닌 것처럼 아파트 브랜드가 그 집의 가치를 말해주는 건 아닙니다. 주택시장마저도 외연의 과시에 집착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 같아 씁쓸합니다.

기획·진행 전형진 기자 withmold@hankyung.com
촬영 이재형·이문규 PD 디자인 이지영·박하영
편집 예수아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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